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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심 고리키의 단편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은둔자>독서일지/문학동네세계문학전집 2018. 6. 16. 12:31반응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은둔자>(막심 고리키 저, 이강은 역)를 읽었습니다. 거짓말하는 검은 방울새와 진실의 애호가 딱따구리, 첼카시, 이제르길 노파, 스물여섯 명의 사내와 한 처녀, 첫사랑, 은둔자, 카라모라까지 7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작가 막심 고리키의 본명은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시코프이며, '고리키'는 러시아어로 '고통스러움'을 뜻합니다. '가장(막심) 고통스러운 사람'이라는 뜻의 막심 고리키. 각각 다른 매력을 가진 단편소설들이지만, 다 읽고 난 후에는 '막심 고리키만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느껴지더라구요. 한 편의 단편만큼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해설도 참 좋았습니다. 세계문학전집 시리즈에 실려 있는 해설들 대부분이 작품만큼이나 재밌지만, 막심 고리키의 인생에 대해 깊게 알 수 있었던 <은둔자>의 해설은 특히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들 중에 익숙한 고전들을 제외하고 어떤 작품이 재밌을까 고민하는 분들께 막심 고리키 <은둔자> 추천하고 싶습니다.
<거짓말하는 검은방울새와 진실의 애호가 딱따구리>는 음침한 숲속에서 어느날 희망을 외치는 검은방울새의 노래로 시작합니다. 새들은 노래의 주인을 찾았지만, 독수리나 매가 아닌 고작 검은방울새가 신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희망을 찾아가자는 노래를 부른 것이 못마땅합니다. 오색방울새는 검은방울새에게 노래를 부른 것이 본인인지 증명해보라고 하고, 검은방울새는 다시 노래를 부릅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당신은 말하자면 사회의식을 일깨우고 있는 것인데요...... 음!...... 솔직히 말해, 당신에게 그럴 권리가 있다고 보는지요? 즉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당신이 무슨 명분으로 그렇게 노래하느냐는 겁니다! 아시겠지만 우리가 실수를, 아시다시피 우리에겐 그런 일이 너무 많잖아요,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아서 말인데요, 그런 목적에서 우리는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의 출발점과 궁극적인 지점을 알고 싶습니다. 말하자면 어디로 왜 우리를 불러내려는 건지요?"
"검은방울새 님이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는 그곳, 저 앞쪽에 무엇이 있는지 냉정하게 살펴봅시다. 여러분 모두 숲을 넘어 날아가보면 그 즉시 알게 됙 겁니다. 숲 너머로 들판이 시작되는데, 여름에는 작열하는 태양이 그대로 쏟아지고 겨울에는 차가운 눈에 뒤덮이는 그런 들판이지요. 그 끝에 가면 새잡이 그리시카라는 사람이 있고요. (...) 우리가 운좋게 그리시카의 새그물을 피해서 마을을 지나 날아간다고 칩시다. 거기에는 또다시 들판이 있을 테고, 마을을 넘어서면 또다시 들판이 있을 겁니다......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영광스럽게도 여러분과 이야기하고 있는 바로 이 숲으로 어쩔 수 없이 다시 날아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가 검은방울새 님이 말하는 그 나라입니까?"
오색방울새는 명분을 묻고, 딱따구리는 진실을 묻습니다. 오색방울새와 딱따구리의 말에 새들은 다시 이리저리 흩어지고, 혼자 남은 검은방울새는 혼자 되뇌입니다. "그래, 딱따구리 말이 옳을지도 몰라. 그러나 그의 진실이 우리의 날개에 돌덩이나 하나 올려놓는 것이라면, 그런 진실이 어디에 쓸모가 있단 말이야?"
짧은 분량이지만 너무 강렬한 느낌의 이야기였습니다. 동화같기도 하면서 묵직한 단편영화 같기도 하고... 비슷한 느낌을 받고 싶어 다음 장을 넘겨넘겨 보았지만, <거짓말하는 검은방울새와 진실의 애호가 딱따구리>와 같은 느낌을 다른 작품에서는 찾기 힘들더라구요. 왜 이강은 역자님이 맨 앞에 실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정말 우스운 이야기를 내가 별로 재미없게 이야기했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시라, 그렇게 하여 위로가 된다면, 그렇게 생각하시라!......'하고 끝나는 이야기. 전혀 우습지 않고 재미없지 않은 이야기였습니다.
다리가 떨리고 걸음이 비틀거렸다. 그는 머리를 잃어버릴까 걱정이라도 된다는 듯이 머리를 잡고 이상한 모습으로 걸었다.
(...)
첼카시가 쓰러졌던 자리의 붉은 핏자국도 첼카시와 젊은이가 서있던 흔적도 금세 비와 파도에 씻겨나갔다. 그리하여 그 황량한 해변에 두 사람 사이의 작은 드라마를 추억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첼카시>
"건강이란 언제나 살기에 충분할 만큼 있는 법이야. 돈이 있으면서도 쓰지 않겠다는 거야? 건강은 금과 똑같아. 내가 젊었을 땐 어땠는지 알아? 해가 떠서 질 때까지 자리에서 한번 일어나지도 못하고 양탄자 짜는 일을 했지. 그때 난 햇살처럼 싱싱했지만 그래도 돌덩이처럼 하루종일 앉아 있기란 쉽지 않았어. 하루종일 그렇게 있다보면 뼈마디가 모두 부서져가는 것 같은 느낌이야. 그런데도 밤이 되면 사내에게 달려가 품에 안겼지. 사랑이 계속된 세달 동안 그 사내에게 달려가 함께 밤을 보냈어. 그래도 이렇게 잘 살고 있잖아, 힘도 충분하고!"
"사랑 때문에 죽는 사람들이 페스트로 죽는 사람 못지않을 거야. 정말이지 세어보면 그 수가 결코 적지 않을걸...... (...) '그럼 이제 그를 볼 일이 없겠군!'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 그런데 보고 싶은 거야. 어떻게든 보고 싶었어...... 그래서 난 거지 행식에 발을 절룩거리면서 얼굴을 가리고 그가 있다는 마을로 들어갔어."
-<이제르길 노파>
그러나 우리는 뭔지 모를 자신의 슬픔을, 햇빛조차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의 힘겨운 우수를, 노예의 우수를 남의 언어로 노래하고 있었다. 우리 스물여섯 명이 살아가는 모습은 그랬다. 커다란 돌집 지하실에서, 3층짜리 건물의 무게가 그대로 우리 어깨를 짓누르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몹시도 힘겨웠다.
-<스물여섯 명의 사내와 한 처녀>
......그때, 어쩌면 운명은 날 교육시킬 목적으로 첫사랑의 희비극적 격정을 맛보도록 해준 것 같다.
만일 진짜 나 자신을 찾아낸다면 그건 정말 온갖 이상한 생각과 감정이 뒤점벅되어 혐오스럽고 끔찍한, 눈뜨고 볼 수 없는 놈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놈이 마음의 여인 앞에 서 있다면 그녀는 얼마나 놀라고 두려워할 것인가. 나는 이런 나를 어떻게든 해야 했다. 나는 바로 이 여인이 진정한 나 자신을 느낄 수 있게 해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나는 그녀에게 찬사를 바치고 싶다. 진정 여자다운 멋진 여자였노라고! 그녀는 있는 것만으로 살아갈 줄 아는 여자였다. 그러나 그녀에겐 매일매일이 축제 전야였다. 그녀는 내일이면 지상에 새롭고 특별한 꽃이 피어날 것이라고, 또 어딘가에서 아주 재미있는 사람들이 찾아와 놀랄 만한 일들이 벌어질 것이라고 늘 기대하며 살았다.
생활의 고단함에 대해서는 별것 아니라는 듯 모기라도 쫓듯이 손을 내저으며 가볍게 웃어넘겼다.
(...)
삶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뭔가 끝없이 펼쳐 보이는 마술사에 대한 어린아이의 믿음 같은 것이었다. 이제까지 보여준 마술도 재미있었지만 더 재미있는 것은 앞으로 나올 테고, 바로 다음 순간, 아니 어쩌면 내일 보게 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분명히 보게 되리라고 믿고 있는!
죽음의 순간까지도 어떻게 된 건지 전혀 알 수 없는 최후의 놀라운 마술을 그녀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첫사랑>
각각의 단편 작품들이 다른 느낌을 주면서도 그 배경엔 막심 고리키의 삶이 묻어있는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부랑자처럼 떠돌며 밥벌이를 해야 했던 막심 고리키. 작가로서 명성을 얻은 이후에도 저항과 혁명운동을 하였고, 체포, 투옥, 국외추방, 기나긴 망명 생활과 의혹이 남는 죽음까지 '평탄하지 않았다'는 말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삶. 사후 신격화로 동상이 세워지고 출생도시가 고리키시로 개명까지 되었지만 소련의 몰락으로 다시 끌어내려지고, 다시 재평가를 받기까지. 막심 고리키의 삶이 더 소설 같아서 작품들 뒤에 실린 '해설'까지 정말 뜻깊고 재밌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보샤키(러시아어로 부랑자, 맨발로 떠도는 사람들이라는 뜻)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의 작품을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책.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중 어떤 책을 읽어볼까 고민하는 분들께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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