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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단순한 열정> 저렇게까지 사랑할 거면 할지 말지 고민 좀..독서일지/문학동네세계문학전집 2018. 4. 1. 23:14반응형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단순한 열정> 중에서-
요즘 주로 이북으로 책을 읽고 있었는데 문학동네 출판사의 굿즈에 혹해 종이책을 구매했습니다. 알라딘 또는 YES24에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권 구매 시 작가의 이름이 적힌 볼펜을, 2만원 이상 구매 시 세계문학전집 전용 독서세트를 사은품으로 선택할 수 있는 이벤트를 진행중입니다. 종이책을 정리하면서 문학동네의 세계문학전집 두 권을 YES24 바이백을 통해 중고로 판매했었는데, 결국 사은품에 혹해 이렇게 또 다른 두 권을 사들이게 되었습니다. 역시 호갱DNA는 어쩔 수 없나봅니다! 그래도 독서세트가 정말 마음에 들어서 자기합리화 그뤠잇을 주고 싶습니다. 문학동네 독서세트는 세계문학전집들과 같은 타이포 디자인을 커버로 한 독서노트와 160권의 전집 스티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Date, Title, Writer 옆에 우표를 붙이는 곳처럼 네모난 빈 박스가 있습니다. 그 곳에 읽은 책의 스티커를 찾아 붙이면 왠지 뿌듯하고 동심으로 돌아간 기분도 느낄 수 있습니다. 160권의 스티커를 모두 붙일 때까지 열심히 달려야겠습니다.
문학동네 독서 세트의 첫 장을 장식한 책은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입니다. 아니 에르노 작가는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자신의 작품들에 대해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설 대부분(어쩌면 전부)이 자전적 이야기라고 해요. 1991년에 발표된 <단순한 열정>은 연하의 외국인 유부남과 사랑했던 이야기입니다. <단순한 열정> 역시 자전적인 소설이며, 작가의 연보에 1988년 9월 25일 러시아에서 <단순한 열정>의 유부남 연인 A를 처음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도덕적인 문제가 생기고도 남는 이 작품, 발표되던 때의 분위기는 어땠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그리고 이 소설을 통해 작가와 팬으로 만나게 되어 연인이 된 서른세 살 연하의 필링 빌랭과의 이야기도 뜨악 했어요. 무려 5년 가까지 연인이었던 두 사람, 필립 빌랭은 아니 에르노와 헤어진 후 <단순한 열정>의 서술방식을 차용해 아니 에르노와의 사랑을 다룬 소설 <포옹>을 발표했다고 해요. 아직 <포옹>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두 사람이 이별에 다다르게 된 계기가 필립 빌랭이 <단순한 열정> 속의 유부남A를 향한 질투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얼른 읽어봐야겠어요. <단순한 열정>은 비록 불륜이기는 하지만, 사랑에 빠진 여자의 흔들리는 시선과 주변 공기의 온도, 모든 감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한 남자의 연락을 기다리며 그 남자에게서 연락이 온다면 착한 일을 하겠다, 착한 일을 하면 그 남자에게 연락이 올 것 같다,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마음. 그 사람과 함께했던 장소에 가게 되면 그날 입었던 옷을 꺼내입으며 그날처럼 그 사람에게서 전화가 오길 기다리다, 결국 혼자서 잠자리에 들 때에야 비로소 하루종일 온 힘을 다해 그 남자에게서 전화가 올 거라는 걸 믿었던 자신이 우스워지는 마음. 그 사람이 아닌 모든 것들은 의미가 없어져버려 하루종일 넋을 놓고 있는 그 느낌이 전해져 읽는 제가 몸살이 날 것 같았던 작품입니다.
그러면서도 슈퍼마켓의 계산대나 은행 창구 같은 곳에서 많은 여자들 틈에 끼여 서 있을 때면, 저 여자들도 나처럼 머릿속에 한 남자를 끊임없이 생각하며 살고 있는지 아니면 예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주말 약속이나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헬스클럽의 미용체조 강스비, 아이들의 성적표 따위나 기다리며 무의미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했다. 지금의 내겐 그런 종류의 모든 일들이 하찮고 무덤덤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 사람과 함께 있던 어느 날 오후, 펄펄 끓는 물이 들어 있는 커피 포트를 잘못 내려놓는 바람에 거실의 카펫을 태워버렸다.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불에 탄 그 자국을 볼 때마다 그 사람과 함께 보낸 열정적인 순간을 떠올릴 수 있어서 행복했다.
때로, 그 사람이 내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건 아닐까 자문해보기도 했다. 나는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태연히 잠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이야기하고 웃는 그 사람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한시도 그 사람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와의 차이 때문에 너무나 불안해졌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아니다. 그 사람도 분명히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 생각만 하는 자신의 모습에 깜짝 놀랄 것이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내 태도가 옳은 건지 그 사람이 옳은 건지 굳이 가려낼 필요는 없다. 그저 그 사람보다 내가 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단순한 열정> 중에서-
<단순한 열정>은 특별한 서사를 가지고 있지 않는 작품입니다.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작가가 그저 기억 속에서 한 남자와 있었던 일에 대해 충실하게 써내려간 기록입니다. 그래서 작년 9월 이후로 연락이 없었던 남자에게서 갑작스럽게 걸려온 전화를 받고 짧은 만남을 가진 후 혼자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 이야기는 어떻게 되는 거지?' 당황해하고 '이제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는 거야.' 다짐하는 것까지 작품의 일부분이 됩니다. '지난날의 추억은 세월이라는 체를 통과하는 동안 미화되게 마련인데, 아니 에르노는 소름 끼칠 정도의 냉정함으로 자신이 겪은 사랑을 미추의 구분이나 도덕적 판단을 미뤄둔 채 낱낱이 써나가고 있는 것이다'는 최정수 옮긴이의 말처럼 너무 생생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때로는 두려움을 자아내기까지 했습니다. 저렇게까지 사랑할 걸 알게 된다면 할지 말지 고민 좀 많이 해봐야겠다는 우스운 생각이 들 정도 두렵기도 하고 그래서 또 찡하기도 한 작품입니다. 아니 에르노 작가의 다른 소설들을 다 읽어보고싶게 만드는 작품이었습니다.
지금 나는 내가 아니면 도저히 읽을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삭제와 교정으로 뒤덮인 원고를 앞에 놓고 있다. 나는 이것이 어떤 결론에도 이르지 않는, 철저히 개인적이고 유치한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의 고백이나 수업 시간에 비밀노트 한쪽에 갈려쓴 외설스러운 낙서처럼. 혹은 아무도 보지 않으리라 확신하면서 조용히 아무 탈 없이 써내려간 일기처럼. 그러나 이 원고를 타자로 치기 시작하고, 마침내 원고가 출판물의 형태로 내 앞에 나타나게 되면 내 순진한 생각도 끝장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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