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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지가 주는 매력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안부를 물었다> 에세이 책
    독서일지 2018. 6. 2.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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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존심과 맞바꾼 사랑이 산산이 부서졌을 때, 잘해보려 애를 쓸수록 더 엉망이 되어 갈 때, 일 속으로 자신을 숨기고 싶을 때, 사람들이 싫어질 때, 꼬인 실을 풀어 실패에 잘 감았다고 생각했는데 내 몸에 감았다는 걸 깨달았을 때, 웬만한 일에는 감흥이 일지 않을 때, 여기 아닌 어딘가에 있다는 상상으로 간신히 하루하루를 버티다가 문득 떠나는 게 여행이라 여겼다. 그리고 떠났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안부를 물었다> 프롤로그 中에서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안부를 물었다>는 소설가 김민아와 시인 윤지영, 두 여자가 여행지에서 1년 동안 주고받은 편지들을 묶어놓은 책입니다. 제목에서부터 깊은 울림을 주는 이 책은 주고 받은 편지의 머릿말이자 소제목 역할을 한 짧은 문장들 하나하나까지 너무나 예쁜 책입니다. '너는 내 삶의 목격자', '스페인의 가로수는 오렌지 나무', '사막의 리듬에 몸을 맡긴 채', '뒷걸음질 치듯 꿈에서 깨어나는 중' 등 편지의 내용들 만큼이나 여운에 남는 글귀들입니다. 소설가 김민아 작가님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일하고, 시인 윤지영 작가님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해요. 사람들이 연구년 계획을 물어볼 때마다 답했던 '세계여행'. 모로코의 사막 마을과 스웨덴 사이를 오간 두 사람의 편지 위에 쌓인 사계절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에세이입니다.


     편지 안에서 둘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건네고 있지만 한 자리에 모아 놓고 보니, 우리가 나눈 편지들은 대화가 아니라 예민하고 취약한 한 사람의 독백 같다. 이 독백은 어느 날은 설익은 질문으로, 어느 날은 쓸쓸한 넋두리고, 또 어느 날은 따뜻한 위로로 다가왔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앞질러 서로의 마을을 대신 속삭여주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여행도 결국 그런 것이 아닐까? 지금의 나를 저만치 앞질러 가 있는 나의 마음과 지금의 나를 쫓아오지 못하고 허둥대는 나의 마음을 불러 낲선 풍경 앞에 나란히 세우는 것.


    -프롤로그


    내레이터가 말하길 누구도 그의 죽음을 몰랐는데 그건 사자의 통장에서 계속해서 돈이 자동으로 인출되고 있었기 때문이래. 세금이 빠져나가고 있으니 경제활동 인구에 속한 거고 그렇다면 그는 죽었을 리 없으니까.


    그녀는 평소 SNS 등 온라인 소통을 즐겨 하던 사람이었어. 그녀의 생각이 담긴 일기나 다름없는 메시지들이, 어느 온라인 바다를 떠다니고 있는지 궁금해지더라. 그녀는 이제 없는데 그의 온라인 계정들은 여전히 살아 있다면 그녀가 죽은 줄 모르는 사람들에겐 여전히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인 거잖아. 자동으로 인출되는 통장처럼 말이야. 그래서 디지털 장의사라는 말도 도는가 봐, 요즘은.


     이렇게 수동적인 방식으로밖에 주변을 정리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럽기도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해방감을 주는지 몰라요. 오죽하면 짐을 정리하면서 오규원의 「죽고 난 뒤의 팬티」 라는 시를 떠올렸을까요. 가벼운 교통사고를 몇 차례 겪고 난 후 차가 조금만 과속해도 "언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는 이 시의 화자처럼 돌아오지 않더라도 부끄럽지 않도록 남은 짐들을 정리해야겠다 싶어서요.


     대학원에서 만난 후 15년 동안 우정을 나누었음에도 서로 몰랐던 새로운 모습들을 편지를 통해 만나게 됩니다. 삶을 대하는 방식,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두 사람의 생각과 의미. '내 삶의 목격자'인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알게 될 때가 있습니다. 한 여자는 여행을 떠났다가 집으로 영영 돌아오지도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안고 짐들을 정리하고, 그 여자의 모습을 통해 다른 한 여자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얘기할 수 있습니다.


    이 작은 동네에 머물며 가장 많이 체감하는 게 바로 이런 거예요. 제가 우주의 중심에 서 있다는 느낌, 혹은 시간을 눈으로 보고 있다는 느낌 같은 거요. 이를테면, 어제만 해도 같은 시각 그 자리에는 샛별만 반짝거리고 있었는데 오늘은 달이 있는 거죠. 하루라는 시간만큼 도톰해진 달이 딱 그만큼의 거리를 움직여 온 거예요. 그러니 이 두께와 거리가 하루라는 시간의 시각적 현현이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여행을 떠나서 느낄 수 있는 감정들 다른 사람들이 주고받는 편지에서 떠올려보는 것도 재밌었습니다. 흐르는 시간이 눈에 보이는 순간, 생소함과 설렘이 뒤섞여 미묘해지는 감정들이 떠오르고, 또 그 시간들이 어제가 되면서 생소함에 익숙해지고. 여행 에세이를 읽는 즐거움이 느껴지는 부분이었습니다.


    대량으로 죽이고, 빼앗고, 삶의 터전을 무참히 파괴하던 양상이 과거의 전쟁이었다면, 지금은 테러리스트라는 이름의 주모자들이 한 사람, 한 사람, 개개인의 영혼을 산산이 부수어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으로 몰아가지. 일부 사람만을 타깃으로 삼거나 도시 전체를 거머쥐고 협박하면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꼭 테러에 희생당한 사람들이 아니어도 우리는 모두 심리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받고, 행동방경은 극히 좁아진다. 이것이 공포 정치의 메커니즘과 뭐가 다를까?


     두 작가가 여행을 떠난 시기에 한국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던 때, 역사적인 순간에서 멀어졌다는 아쉬움, 다른 나라에서 자국을 바라보는 느낌. 멀어진 몸만큼 마음은 멀어지지 않아 두 작가의 눈으로 지난 시간을 다시 보는 것도 새로웠습니다.


    우리 세대, 그리고 우리보다 어린 세대에게는 도전정신과 패기가 문제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모험의 서사가 허락되지 않는 시대를 산다는 게 문제인지도 모르겠어요. 오로지 반복의 서사만이 가능하죠.


     반복의 서사 속에서 쳇바퀴를 굴리며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되돌아봤습니다. 젊은 세대들을 편견 속에 가두며 우리와 다른 세대라고 단정짓지 않는 시선에서 작가님 세대의 모험의 서사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생각해보는 시간도 가질 수 있어 오래 여운이 남는 책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편지 속에 깃든 여행 이야기, 인생 이야기에서 깊은 여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상 곳곳에서 짧은 연락이 가능한 시대. 편지만이 줄 수 있는 감동을 느껴보고 싶은 분들께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안부를 물었다>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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