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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제9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젊은 작가들의 참신한 소설독서일지 2018. 6. 4. 14:25반응형
작가노트_ 대신 미래의 나는 평범하고 성실하게 늙어가면서 앓는 질병과 처방받은 약품의 성분으로 나의 많은 부분을 설명하려 할 것이다. 주의를 기울여 수도꼭지의 온도를 조절하느라 오랜 시간을 허비할 것이고, 매번 왼쪽부터 먼저 닳는 신발이라든지, 길 한가운데 버려진 양말 같은 것을 발견하며 이건 또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렸나 궁금할 것이다.
-<그들의 이해관계> 작가노트 中
2010년에 제정된 후 9회를 맞은 젊은작가상 작품집을 읽었습니다. 작가노트와 해설마저도 너무 좋은 작품집입니다. 작년까지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 종이책 가격이 어땠었는지 모르겠는데, 올해는 특별 보급가로 5,500원에 행사를 하고 있더라구요! 온라인 교보문고에서 주는 세실주희 핀버튼 굿즈까지 선택했습니다! 사실 핀버튼 쓸 곳도 없는데... 그래도 안 가지면 섭섭할 것 같아 선택! 알라딘 굿즈로 스누피 독서대를 들인 이후로 다시 종이책을 야금야금 사들이는 것 같습니다. 이리저리 쟁여놓은 전자책들이 100권 넘게 있는데 종이책까지 야금야금야금..
2018 제 9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는 박민정 <세실, 주희>, 임성순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 임현 <그들의 이해관계>, 정영수 <더 인간적인 말>, 김세희 <가만한 나날>, 최정나 <한밤의 손님들>, 박상영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까지 9편의 소설이 실려 있습니다. 2014년 젊은작가상 수상작품들이 정말 좋았었는데, 올해 실린 작품들을 읽으면서 그때 감정들이 생각나더라구요. 수상 작가님들 앞으로도 좋은 작품들 써주시면 재밌게 읽겠습니다.
7개의 작품들 모두 각각 다른 매력을 갖고 있지만, 그 중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과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가 기억에 남아요. 먼저 두어달 후에 지금보다 더 강한 햇빛이 쨍쨍 내리쬘 때 다시 꺼내 읽고 싶은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을 소개할게요!
"일단 추상화지만 구도 좋고, 눈에 들어오는 색감이고, 뭘 그린건지 모르겠지만 눈길을 끄는 면이 있죠. 꽤나 꼼꼼하게 그려서 대충 그린 것 같은 느낌과는 달리 디테일한 면들이 살아 있어요. 나쁘지 않아요. 너무 손이 가는 대로 그렸다는 것만 빼면. 저 자식도 자기가 뭘 그렸는지 모를걸요. 그러니까 이렇게 떨어져서 봤을 때는 통일감이 없고, 눈에는 들어오지만 감흥은 없어요. 그냥 그림이죠. 흔한 추상화, 유화. 이게 솔직한 버전."
선배가 피식 웃었다.
"다른 건? 더 해봐."
"무채색 계열의 색으로 고독한 현대인의 절망을 밝은색으로 그가 품고 있는 꿈과 대비해 그린 작품으로 역동적인 꿈과 정적인 고독을 대비해 현대인의 실존적 고뇌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색의 대비가 깨어져 만드는 불균형이 이러한 은밀한 내면적 불안을 보여주는데, 심리적 불완전성을 강렬한 이미지로 화했죠. 이게 뭐, 적당히 이빨까는 버전이죠."
"재밌네. 그런 식으로 이빨 터는 게 통하기는 하는 거야?"
"대중은 물론 이걸 사는 사람도 아무것도 모르거든요. 뭐가 아름다운지, 뭐가 좋은지 모르는 바보들이라고요,"
미술과 자본은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합니다. 그 사이의 균열에서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속물적이고 현실적인 캐릭터가 주인공입니다. 젊은 시절 수도권의 한 미대에서 시간강사로 일하며 평론, 대학원, 협회 총무 등 여기저기 기웃거렸지만 어디 하나 출구가 없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한 후배의 개인전 뒤풀이 자리에서 만난 선배로부터 영국 유학을 권유받습니다. 유학의 목적은 미술과 자본을 이용한 장사에 쓰일 명함 한줄. 유학을 다녀온 후 선배의 큰 그림대로 에이전시는 성공을 거머쥔 듯 싶었습니다. 결국 자본에 배신을 당하기 전까지는 말이죠. '엄밀히 말하면 한 번에 망했던 것은 아니다. 거의 팔 년에 걸쳐 서서히 말라죽어갔다.' '지난 팔 년간, 인맥을 다진다며 이곳에서 거둔 성과는 초대장 검사도 하지 않는 론칭 파티에서 초대장을 받는 정도였다.'
나락 끝에 서게되었을 때 어느 노신사에게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 팸플릿을 받게 됩니다. '금세기 최고의 공포 퍼포먼스'라는 허접한 문구 따위를 만드는 자들이 그럴듯한 걸 할 수 있을 리 없다는 걸 알지만 결국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혼 서류보다는 낫겠지 싶어 발걸음을 옮깁니다.
비둘기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손가락으로 날 지못했다. 어디까지가 쇼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일까? 저들은 관람객일까? 공범일까? 아니면 또 다른 양일까? 비둘기들은 나를 향해 다가왔다.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뒷걸음을 쳤다.
추상이 회화의 경계를 지웠던 것처럼 공포와 퍼포먼스가 뒤섞이며 현실과 꿈의 경계가 지워지고 있었다. 포스트모던이 구조를 해체했던 것처럼 나 또한 제단 위에서 해체될 터였다.
비둘기들의 붉은 눈이 날 향해 다가오는 동안 등뒤로 발소리가 들렸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소리가 어둠 속으로 녹아들 때마다 소름이 몸을 따라 역병처럼 퍼졌다. 보이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암흑이 머리 위로 떠올랐다. 미뤄온 운명이 비로소 날 따라잡을 차례였다. 늑대는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아픈 것도 모를 겁니다."
경고. 결코 겁에 질리지 말 것.
그 후 주인공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마디가 이 소설을 유쾌하고 으스스한 결말로 이끕니다. 통쾌하다, 현실적이다, 그래서 더 무섭다. 미술과 자본이라는 것이 이렇게 공포스러운 것이구나. 소설의 결말은 이런 순간에 이런 식으로 내야 하는구나. 여러가지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신선하고 재밌고 무서운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미리 말했죠. 작가노트 같은 건 꼭 읽을 필요는 없다니까요.'로 끝나는 작가노트에서도 임성순 작가님의 센스를 느끼며 다음장을 넘길 수 있었습니다. 다른 작품들도 궁금해져요!
다음으로 소개할 작품은 박상영 작가님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입니다. 분량을 보아 중편소설인 것 같았으나 재밌게 읽느라 후루룩. 한없이 평범한 날들을 보내고 있는 주인공은 퀴어 영화 전문 제작사 사무실에 앉아 파일 공유 사이트들을 돌아다니며 저작권을 침해한 게시물 삭제 요청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미자에게 펑크난 GV 행사에 대신 참석해달라는 연락을 받게 됩니다. 영화제 본선에도 진출한 영화감독이지만 지금 처지를 생각하면 갈 수가 없습니다...만 공짜 영화표 30장 딜에 승락. 과거 악연이 있었던 오감독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내가 홍상수라고? 여자 한 명 안 나오는 홍상수 영화가 어디 있어. 사지말단을 자르면 김기덕, 장식적이고 예쁜 벽지가 붙은 곳에서 살인하면 박찬욱이라고 하겠지. 그들은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믿는 세계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박미자가 지갑에서 삼만원을 꺼내 주며 오감독을 택시에 태워 보내라고 했다. 나는 주머니에 돈을 집어넣고는 핸드폰으로 택시 호출 앱을 켰다. 오감독의 집은 역삼동 쪽이라고 했나. 나는 목적지에 강원도 화천의 한 고깃집을 입력했다. 택시 등급은, 오감독의 품격에 맞는 블랙.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이 미술계가 배경이었다면,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는 영화계(에서 멀어졌지만)가 배경입니다. 한때는 독립영화 감독으로 거창한 꿈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세계와 조금 멀어진 한없이 평범한 날들을 보내고 있는 주인공이 연인(인듯 아닌 듯)인 왕샤와 '세상의 작은 점'조차 되지 못하는 일상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숨을 참는 동안 내가 너무나도 좋아했던 그가 더이상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를 좋아했던 시절의 나,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나조차도 이미 이 세상에는 없는 존재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때의 우리가 느꼈던 감정은 모래바람처럼 한순간에 우리를 휩쓸고 지나가버린 것이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울지는 않았다. 신파는 영화로 족했다.
우리는 세상의 작은 점조차 되지 못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우리는 세상의 아주 작은 점조차 되지 못했다. 점은커녕 그 어떤 것도 되지 못했다. 인생을 걸고 했던 일들은 모두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되어버렸다. 칸영화제를 가기는커녕 제대로 된 퀴어 영화를 찍지도 못했고, 현대무용가가 되지도 못했다. 보란듯이 사랑을 하지도 못했고, 내가 누구인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어영부영 나이만 처먹었다. 동성애자이면서 제대로 동성애를 하지도 못했고 그것도 모자라 이성애자들로부터 마이크 하나조차 제대로 훔치지 못했다. 이토록 처절한 실패는 영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우리는 망했다.
공감되는 부분도 많았고, 한없이 평범한 날들을 통찰하는 작가님의 시선과 유쾌하다가도 감정을 톡 건드리는 필력에서 젊음을 느끼며 재밌게 읽었습니다. 7편의 작품들 모두 재밌었고, 유독 작가노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책이기도 합니다. 내년 젊은작가상 수상 작품들도 궁금해지고 수상 작가님들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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