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소설 <걸어도 걸어도> 어머니를 떠올리면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는 어느 길에서
    독서일지 2018. 6. 4. 18:11
    반응형

     <아무도 모른다>로 유명한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소설 <걸어도 걸어도>를 읽었습니다. 동명의 영화 <걸어도 걸어도>(2008)의 원작소설인지 영화를 소설화한 것인지 정보를 찾을 수 없네요. <태풍이 지나가고>와 <걸어도 걸어도>가 함께2017년 가을에 한국에 출간되었다는 정보만 알 수 있었습니다. '걸어도 걸어도 원작소설'이라고 검색을 해봐도 별다른 결과가 없는 것을 보니 영화를 소설화한 것 같습니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를 오래전에 봤던지라 내용이 가물가물해서 소설을 읽으며 영화의 분위기를 떠올려보기도 하고 잔잔하게 와닿는 소설 문장들에서 새로운 감정들을 느껴보기도 했습니다.


     소설 <걸어도 걸어도>의 줄거리는 십오 년 전 세상을 떠난 장남(준페이)의 기일을 맞아 온 가족이 모인 하루를 담아낸 이야기입니다. 회상으로 시작하는 소설의 도입부와 중간중간 여러 시간대를 오가는 소설이라 오직 '하루'를 온전히 담아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가족들의 삶이 응축된 그 '하루'가 소설의 주요 분위기를 담고 있어 잔잔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소설이지만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곳곳에 있어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의 주요 소재인 '가족'을 마치 어떤 카메라 앵글로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로부터 상당히 긴 세월이 흐른 것만 같지만,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이라든가 지금이라면 좀 더 이렇게 했을 텐데라든가....... 이제 와서 그런 감상에 젖을 때가 종종 있다. 그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시간과 함께 가라앉아서, 오히려 흐름을 가로막는다. 잃어버릴 것이 많았던 하루하루 속에서 한 가지 얻은 것이 있다면, 인생이란 언제나 한발 늦는다는 깨달음이다. 체념과도 비슷한 교훈일지도 모른다.


     15년 전 뜨거운 여름날, 준페이는 물에 빠진 소년을 구하다 목숨을 잃습니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준페이의 기일이 되면 료타와 지나미는 부모님의 집으로 내려와 준페이의 제사를 지냅니다. 에어컨 틀기를 꺼려하는 아버지 때문에 설날에도 집에 가는 것을 꺼려하는 료타지만 형의 기일만큼은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 료타가 마흔을 갓 넘겼던 해의 형의 기일에 결혼을 앞둔 예비 아내와 아내의 아들 아쓰시와 함께 부모님을 집으로 갔던 하루를 그리고 있습니다. 부모님 댁으로 가는 기차 안, 료타는 반에서 기르던 토끼가 죽자 토끼에게 다같이 편지를 쓰자는 선생님의 말에 킥킥 웃었다는 아쓰시에게 마음이 쓰입니다. 아내가 될 여자의 5학년이 된 아들, 어린 소년의 눈동자에서 슬픔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분명 천국에서 읽을 거야." 따위의 뻔한 소리는 통하지 않는다. 어른보다도 현실적으로 세상의 본질을 꿰뚫고 있음을 나는 그의 눈동자에서 보았다. 그렇다. 눈앞에 앉은 소년은 그 나이에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커다란 상실을 경험한 것이다. 슬픔의 깊이에 나이는 상관없다.


    자세히 보니 어머니는 립스틱까지 옅게 바르고 있다. 집을 나서기 전에 어떤 모자를 쓸까 고민하던 것 같더니, 나오면서 화장대 앞에서 바른 건가? 마치 오랜만에 연인을 만나러 온 아가씨 같았다. 나도 모르게 눈을 돌렸다. 아들은 평생 연인이라는 말을 들어 보긴 했지만, 어머니에게 있어서 형은 정녕 그 말 그대로의 존재였다. 아버지에 대한 애착이나 신뢰 따위를 잃으면서 어머니의 그 감정은 한층 강해진 것 같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아쓰시가 유카리 옆에서 물끄러미 바라본다. 죽은 토끼에게 편지를 쓰는 것조차 거절했던 그가, 어머니의 모습을 어떤 마음으로 보고 있을까. 그 표정에서는 좀처럼 상상되지 않았다.


     오랜만에 모인 가족들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삐그덕거립니다. 바로 헤어져도 좋으니 제발 결혼을 하나고 하던 어머니는 아내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자존심만 강하고 배려심은 없는 아버지, 조금씩 삐그덕거리는 균열 속에서도 아이들만큼이나 마음 편한 누나의 남편 노부오. 한 바탕 작은 소란이 휩쓸고 갑니다.


     "아이스크림 말고 보리차 마셔."

     누나가 큰 소리로 말했다. 일상의, 어떤 의미에서는 혼잡스러운 시간이 집안에 돌아온 것 같아서 조금 안심했다.


     작은 소란이 있은 후, 일상의 혼잡스러움이 다시 스며든 집의 분위기를 잘 나타내어주는 문장입니다. 전체적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큰 위기나 장애물은 없지만 집의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문장들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강점인 것 같습니다. 특별한 소재로 와닿기 힘든 가족 이야기, 그렇지만 촘촘한 감정을 헤아려보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이야기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만의 시선으로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형도 살아있었다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죠. 인생이라는 게."

     어머니가 초밥집 아들인 고마쓰를 두고 했던 말을 나는 그대로 반복했다. 아무리 훌륭한 아들이고, 성적이 좋았다고 해도, 지금 살아 있으면 벌써 45세. 어디에나 있을 법한 그저 그런 아저씨가 됐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기대했던 인생의 선로 위를 형이 계속 달렸을 보장 같은 건 그 어디에도 없다. 의사를 그만두고 실업자가 됐을지도 모르고, 이혼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언제까지고 형의 존재를 이상적으로만 이야기하는 것은, 현실을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에겐 폐를 끼칠 뿐이다. 그런 속내를 담아서 비꼬아 말할 생각이었으나, 조금 지나쳤던 것 같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움직임을 멈추었고 거실은 조용해졌다.


    뭐, 어차피 사흘만 지나면 갈 테니까. 지금 내려가게 되면 그대로 설날까지 지내게 되는 수가 있다. 그것은 피하고 싶었다. 그 정도로 어머니를 위해 시간을 쪼갤 여유는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없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 후회랄까 죄책감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는다. 어머니가 쓰러질 때 곁에 있어 봐야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지는 솔직히 모르겠지만, 그 후로 나는 몇 번이나 어머니를 끌어안고서 구급차가 오기를 기다리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을 꾸지 않기까지 삼 년이 걸렸다. 이 일로부터 배운 것은, 인생에는 어떻게 해도 돌이킬 수 없는 실패가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이를 깨닫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똑같아. 부모한테는 똑같아. 미워할 상대가 없는 만큼 이쪽만 더 괴로울 뿐이지. 그 아이(준페이가 구해준 아이)한테도 일 년에 한 번쯤은 괴로운 날이 있어도 그걸로 벌받지는 않을 거야......."

     어머니는 아까부터 같은 리듬으로 뜨개바늘을 움직인다. 형광등에 비친 그 굵은 손가락이, 어머니와는 별개의 생물처럼 느껴져 어딘가 섬뜩하게 보였다.

     "그러니까,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불러야지......."

     조금 전 현관 마루에서 무릎을 꿇어 가며 보여 준 미소를, 나는 완전히 거꾸로 받아들이고 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 소름이 끼쳤다.

     "그런 생각으로 해마다 불렀단 말이에요?"

     내 목소리가 조금 떨렸던 것 같다.

     그 후 이어진 "너무하네......"라는 한마디는 어머니에 대한 비난이라기보다는 한숨에 가까웠다.

     "너무할 거 없어. 이 정도면 보통이지......."

     어머니의 말은 오히려 당신의 기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오히려 비난하는 것 같았다. 슬픔이 시간과 함께 발효되고 썩어서, 가족에게도 공감받기 어려울 정도로 변질되었음을 본인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터버져린 감정과 뒤늦은 후회, "십 년도 안 돼서 잊어버리면 곤란하지. 그 애 때문에 우리 준페이가 죽은 거니까......" 시간과 함께 발효되고 썩어서 가족조차 무서워하는 어머니의 슬픔. '그렇게 어머니를 떠올리면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할지도 모르겠다'는 료타의 회상을 따라 그해 여름날의 '하루'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를 검색해보니 평점이 너무 좋은데, 왜 시간이 지났다고 잊혀진 영화가 되었을까 싶어서 영화를 다시 보려고 합니다. 영화가 오래 마음에 남아있는 분들은 소설 <걸어도 걸어도>도 꼭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반응형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