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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무 한낮의 연애』 웃음, 긴장, 폭력, 무기력, 아주 없음과 있지 않음. 김금희 단편소설집
    독서일지 2018. 6. 2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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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한낮의 연애, 조중균의 세계, 세실리아, 반월, 고기, 개를 기다리는 일, 우리가 어느 별에서, 보통의 시절, 고양이는 어떻게 단련되는가, 9편의 단편을 실은 김금희 작가의 단편소설집 『너무 한낮의 연애』를 읽었습니다. 청량한 느낌의 표지와 '너무 한낮의 연애'라는 제목. 젊은 연애 소설이나 에세이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요, 예상과 다른 내용들이었지만 김금희 작가님의 세계가 느껴지는, 무거운 울림이 있는 소설들이었습니다. '폭력'-'긴장'-'웃음' 세 가지 고리, 아버지(혹은 큰오빠)의 폭력(「고기」, 「개를 기다리는 일」, 「보통의 시절」), 아주 없음과 있지 않음, 썩는 발 등의 몇 가지 키워드가 두세 작품에서 반복되어 등장해서 기억에 남습니다. 특히나 인물들의 표정과 상태가 주는 잔상들이 다음 단편으로 넘어가서도 많이 겹쳐져 보였습니다. 양희의 무표정과 조중균이, 긴장과 웃음을 오가는 사이에 있는 그녀들이, 그리고 그녀들 곁에 고요하고 홀가분한 눈빛과 표정으로 바뀐 채 서 있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인물들임에도 한 사람으로 겹쳐져 보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해가지 않는 인물이 없고, 그 인물들 속에서 나의 모습들을 발견하는 것 같아 아프고 찔렸던 소설집입니다. 각각의 작품들을 따로따로 봤다면 어땠을 지 모르겠습니다. 한 편의 단편에서 남은 잔상이, 다음 이야기에 덧씌워 지고, 또 다음 이야기에 덧씌워 지고, 황정은 작가의 단편소설집을 볼 때 느꼈던, 한 작가의 세계 속에 푹 빠질 수 있었던 느낌! 김금희 작가님의 단편소설집을 읽으면서 또 느낄 수 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다가오는 9월에 KBS 드라마스페셜에 「너무 한낮의 연애」가 단막극으로 방영된다고 하니 이 또한 너무 기다려집니다.


     「너무 한낮의 연애」 줄거리, 필용이 영업팀장에서 시설관리과로 인사이동 통보를 받으며 시작합니다. 인사이동 통보를 받았을 때 필용이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십육 년 전 종로의 맥도날드였습니다. 인사이동에 웬 맥도날드? 이 맥락 없는 생각을 뒤로한 채 학부모회에 돌릴 명함을 생각하며 영업팀장으로 여분의 명함을 미리 더 발급받을까, 혼자 점심을 먹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되는데…, 현실적인 생각들을 합니다. 그렇게 별별 일을 다 생각하던 필용의 발걸음이 별 생각없이 종로, 맥도날드로 향했습니다. 가는 길에 퀸의 노래를 듣고, 따라 부르다 사레까지 들리다 못해, 급기야 울기까지 합니다. 십육 년이 지났는데도 변한 것 하나 없는 맥도날드. 변한 것이 있다면, 더 이상 '피시버거'는 안 판다는 것. "대표 메뉴였는데 왜 없냐고?" "뭐 다른 걸로 바뀐 게 아니라 없어? 아주?" 뭔가 비슷한 것으로 바뀌었다면 불쾌했을 테지만, 아주 아주 그냥 끝이라니, A가 A인 채로 사라져버렸다니, 차라리 속이 시원합니다. 그 후로 필용은 종종 맥도날드에서 점심을 해결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필용은 맞은편 건물에 걸린 연극 현수막을 보게 됩니다. "나무는 'ㅋㅋㅋ' 하고 웃지 않는다" 필용은 놀랍니다. 왜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았을 때 16년 전의 맥도날드가 떠올랐는지를 떠올립니다. 과 후배였던 양희 때문입니다. 정말 더럽게도 재미없는 대본으로 기억하고 있는 "나무는 '크크크'하고 웃지 않는다"를 매일 끄적이던, 어느 날 문득 자신에게 느닷없는 사랑 고백을 건넸던 양희입니다.


    필용은 거의 매일,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양희에게 물었다. 물론 그 말만 하지는 않고 여전히 자기 자랑과 불황의 시대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늘어놓았지만 전처럼 그런 이야기가 목적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낮의 시간을 지나면, 맥도날드에서 나오면, 양희와 헤어지면, 양희의 외모나 한심스러움, 생기 없음, 무기력함, 가난에 대한 은근한 경멸이 껌의 뒷맛처럼 느껴지곤 했다. 그런데도 다음날 정오가 되면 사랑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장마가 시작되었을 무렵 이런 괴상한 애정 전선에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다른 날과 다름없이 햄버거를 먹으며 앉아 있는데 양희가 깜빡 잊을 뻔했다는 투로, 아, 선배 나 안 해요, 사랑, 한 것이었다.

    (…)

    그렇게 오랫동안 나를 사랑했으면서 어느 날 갑자기 없다니? 혹시 자기 사랑을 받아주지 않아서 화가 난 걸까, 필용은 생각했다. 자존심이 상했을 수도 있어. 그렇게 하루에 한 번씩 사랑한다고 말했는데 내가 겨우 한 것은 햄버거나 사주면서 떠보듯 사랑하니, 안 하니, 물어본 것 밖에 없으니.


    양희야, 양희야, 이제 피시버거는 안 판단다. 양희야, 양희야, 너 되게 멋있어졌다, 양희야, 양희야, 너 꿈을 이뤘구나, 하는 말들을 떠올리다가 지웠다. 안녕이라는 말도 사랑했니 하는 말도, 구해줘라는 말도 지웠다. 그리고 그렇게 지우고 나니 양희의 대본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됐다. 하지만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도 어떤 것은 아주 없음이 되는 게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남았다.

    -「너무 한낮의 연애」 중에서



     자신을 찾아온 필용에게 "그냥 이런 나무 같은 거나 봐요."라고 말하던 양희, 16년이 지나 다시 자신을 찾아온 객석의 필용에게 느티나무처럼 팔을 흔드는 양희, 너무 한 낮의 겨울을 견디고 있는 가로수. '견딤의 대상은 한 계절, 한 달, 한 주도 되지 못하고 그저 하루에 지나지 않았다. 내일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고 어쩌면 더 나쁠지도 모르니까. 그 나쁨의 상태에서 최선을 다해 오늘을 지키는 것, 그것은 나약함일까. 그렇다면 그런 하루의 무게는 정당한가.'(작가의 말). 맥도날드에서 그래도 취준생은 아니라는 위안을 삼던 필용, 아주 없이 사라진 피시버거처럼 양희도 아주 없었다면 그 위안이 좀 더 오래 지속되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아주 없음과 있지 않음의 차이로 흔들리는 질문들, 하지만 그 질문들을 하기엔 너무 한낮인 정오입니다.



    "주먹이래요, 주먹." 그사이 잠이 들었었는지 부장이 몸을 움찔하면서 눈을 떴다. "뭐가 주먹이야?" "주먹구구 아니래요, 주먹이래요." "그래그래, 젊은 사람들 주먹 불끈 쥐고 기운 내야지, 힘내야지. 젊음의 주먹, 좋다." 부장이 갑자기 박수를 쳤다.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좋을 대로 해석해주는구나. 이런 게 정규직의 힘인가, 생각하고는 나도 꾸벅꾸벅 졸았다.


    나는 그 집이 라디오 방송국 뒤편을 돌아 몇번째 골목에 있었는지 생각했다. 골목 어귀의 작은 공터에서 얼마를 걸어야 나오던 곳이었던가를. 그리고 그 집에 무엇이 있었던가를 떠올리기 위해 해썼다. 하지만 뭐가 있었는가보다는 뭐가 없었는가가 더 세세히 떠올랐다. 거기에는 육 인용 테이블이 없었다. 복수를 잊어버러니 조중균씨도 없었다. 나태한 조중균씨도 없고 내 사인이 적힌 수첩도 다행히, 아주 다행히 없었다. 문장과 시와 드라마는 있지만 이름은 없는 세계, 내가 간신히 기억하는 한, 그것이 조중균씨의 세계였다.

    -「조중균의 세계」 중에서


    방에 숨어 있던 그녀가 거실에 나와 그렇게 웃으면 운좋은 날이면 아버지가 머쓱해져 더는 매질하지 않을 때도 있었고 운이 나쁠 때는 엄마와 함께 머리채를 잡히기도 했었다. 그러면 그녀는 무서웠지만 이상하게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갑자기 마음이 붕 뜨고 즐거워져서 캑캑거리며 방바닥을 구르기도 했다. 지금도 그녀는 쉽게 긴장하고 쉽게 긴장이 풀어졌으며 그 간극에서는 항상 웃음이 터졌다.


    그녀는 이제 회전축을 잃고 공회전중인 삶을 생산적인 폭력을 휘둘러서라도 나아가게 하고 싶어하고, 마지막에 남편이 천만원과 함께 들고 온 핏물이 배어나온 자루는 마치 그 소망이 충족된 자리에 남겨진 흔적처럼 섬뜩하다. 이상하리만치 고요해진 남편의 눈, 끝내 항의 철회를 받지 못한 마트 직원의 갑자기 홀가분해진 표정에 대해 작가는 설명을 멈추고 갈고리 같은 물음표만을 남겨둔다.

    -「고기」중에서


     성탄절에 가족들이 만나는 것은 나쁘다. 사 년 만이라면 더 그렇다. 심장이 얼어붙을 것 같다. 하지만 심장이 그렇게 쉽게 얼어붙지는 않지. 어려서 큰오빠가 무서워 심장이 멎을 것 같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큰오빠의 화가 가라앉으면 우리는 다시 심상하게 모여 아이스크림 같은 것을 먹었으니까. 그것은 심상한 일이었다. 심상한 분노, 심상한 공포, 심상한 회복, 심상한 단맛.


     모두 웃었다. 이런 긴장 속에서 어떻게 웃을 수 있는지 몰라도 교수는 뭐가 되나에서 웃음이 터졌다. 언니를 내려주려면 서초에서 빠져야 했지만 웃느라 지나치고 말았다. 하기는 그러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었다. 왜 늘 언니만 쏙 빠지는가. 김대춘을 보러는 안 가도 나와 함께 차에 남아 오빠들을 기다리기는 해야 할 것 아닌가. 전혀 상관없는 상준이도 일산을 가는데 언니가 뭐라고 빠져? 한소리 들을 줄 알았는데 막상 이렇게 되니까 언니는 일산까지 가보겠다고 했다. 아마 웃음 때문일 것이다. 같이 웃거나 같이 울고 나면 긴 공백을 뚫고 친밀감이 되살아나니까.

    -「보통의 시절」 중에서


     『너무 한낮의 연애』에 수록된 단편소설들 모두 좋았습니다. 특히 「조중균의 세계」. '나' 보다는 조중균과 해란에게 더 시선이 갔습니다. 여러 아르바이트들을 한 아우라가 있지만, 동종 경력이 있는 '나'와 1명의 정규직 자리를 겨루며 한 발로 버티다 못해 한 발 뒤로 물러나는 해란, 회사라는 세계에 완전히 동요되지 못하는 조중균, 'O명 모집'이 +1과 -1이 되어 결국 '총합 0명'이 되어버린 한 세계를 보여주지만, 뭐가 없었는가에 대한 '나'의 시선을 통해 이름 없는 세계, 조중균의 세계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집 앞에 내린 해란씨는 목발을 짚고 올라가다가 멈춰 서서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한 장 찍는다. 화자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꽃 한 송이, 고양이 한 마리 없는데 뭘 찍나, 생각하며 돌아선다. 그런데 화자에 의해 구태여 의미 부여되지 않고 넘어가는 이 장면에는 어둠 속에 잠겨 있는 것들을 보려는 따뜻한 응시가 있고, 그 응시를 다시 유심히 바라보는 동안에 아련하고 혼곤하게 스며드는 이해가 있다. 그간 한 번도 조중균씨를 제대로 바라보거나 이해하는 것 같지 앉았던 화자는 이 순간에 잠시 해란씨와 나란한 시선으로 조중균씨를 바라보는 것 같다.'(해설)

     「고기」, 「보통의 시절」은 '폭력, 웃음, 긴장' 그리고 '가족'의 관계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 작품입니다. 「개를 기다리는 일에서도 아버지의 폭력이 드러나고 있었지만, '긴장과 웃음의 간극'이 나타내는 그녀와 '나'라는 인물에 대해서 무언가 자꾸 생각을 배보고 싶어 지더라구요. 다른 단편들을 다 읽기도 전에 해설을 뒤적여보고 싶은 느낌... 소설들을 다 읽고 해설을 읽어봤지만, 그래도 뭔가 부족한 느낌. 김금희 작가님의 세계에 대해 더 알아보고 더 찾아보고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작품이었습니다. 다가오는 9월 KBS드라마 스페셜도 기다려지고, 양희 역 최강희, 필용에 고준이라니! 이건 꼭 봐야겠다는 생각, 그리고 9월 역시 더울 테지만, 더 더울 7월, 8월에 김금희 작가님의 다른 작품들도 많이 읽어보고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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