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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난민> 우리, 멋진 곳으로 가자.독서일지 2018. 6. 28. 17:38반응형
<어느 날 난민>(표명희, 창비청소년문학83)은 인천 공항 근처 섬의 난민 캠프를 배경으로 해나와 민, 그리고 여러 사연들을 가진 난민들의 이야기입니다. 서울을 떠나 '섬'으로 오게 된 한국인 해나와 민. 로빈슨 크루소의 섬을 기대했던 아이 민은 상상과 다른 섬의 모습에 실망합니다.
'우리, 멋진 곳으로 가자.'
잠결에 들었던 해나의 말에 자연을 품은 신비의 무인도를 생각했던 거죠. 편의점 사장의 꾐에 넘어갔던 것이 분해 편의점 사장의 차를 훔쳐 '섬'으로 도망온 해나. 반지하 대신 이제 이 차가 해나와 민의 집입니다. '난민센터 결사반대' 플래카드가 붙어 있고 '난데없는 난민센터' 구호가 들리는 이 곳은, '두 개의 섬을 연결해 더 큰 섬 하나로 만든 땅에 공항이 들어서면서 형성된 작은 신도시(작가의 말)'입니다. 시위가 빈번한 광화문과 시청 사이의 편의점에서 일했던 해나는 시위대라면 신물이 납니다. 서명 운동을 그냥 지나치려고 하다가 사은품을 받으려고 아무렇게나 서명을 합니다.
"난민센터인지 뭔지 내가 알게 뭐냐. 사은품 챙기면 됐지."
-우리가 개미들 집을 깔아뭉갰나 봐.
아이가 잔디밭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세히 보니 개미집이 보이기도 했다.
-우리가 지금 남의 집 걱정하게 생겼어?
해나가 짜증스레 내뱉었다.
자연의 품 안에서 실컷 뒹굴고 난 결과는 참혹했다.
-세상에 진짜 공짜 없네. 우리가 이놈들 밥상에 올라앉아 있었던 거야.
훔친 차를 '우리집'으로 삼고자 했으나 해나와 민에게 세상은 벅찹니다. 얼마 후 해나는 난민 보호 센터에서 개최하는 영어 캠프에 민을 맡기고 사라져버립니다. 민은 누나 해나를 기다리는 일이 너무나 익숙한 아이입니다. 의도치 않게 민을 떠맡게 된 진소장과 김주임. 김주임은 아직은 텅 비어 있는 난민 센터에 온기가 돈다며 민과의 한시적 동거를 반깁니다.
"어쩌면 이곳의 비공식 1호 난민이 될 수도 있어요."
민은 해나를 '누나'라고 부르지만, "넌 변기 구멍으로 사라질 수도 있었어." 술에 취했을 때 혀 꼬부라진 말을 했던 해나는 민의 누나가 아닌 미혼모, 민의 엄마입니다. 고아원에 맡기는 것보다 난민 센터에 맡기는 것이 더 마음 편한 해나는 진소장과의 통화에서 민은 아직 출생 신고가 안 돼 있으니 난민 자격이지 않느냐고 우깁니다. 누군가에게는 '난민'이라는 말이 더 마음 아프지만, 해나에게는 민을 고아원에 맡긴다면 정말 민의 보호자 자격이 박탈당하는 느낌이기 때문에 이런 선택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의도치 않게 비공식 1호 난민이 된 한국 아이 민, 진소장, 김주임과 센터 직원들이 첫 난민들을 만나는 날이 왔습니다. 민 또래의 아이 샤샤, 샤샤의 부모 모샤르와 옥란, 가족의 명예 살인으로부터 도망쳐온 찬드라, 파리의 자유의 위협에서 도망쳐 온 아프리카 부족장 딸 웅가와 프랑스어 선생 미셸 커플, 그리고 뚜앙. 각자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합니다.
가장 마음이 아팠던 사람, 찬드라. 찬드라는 집안이 정한 결혼을 하지 않아 가족의 명예를 더렵혔다고 해서 오빠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 했습니다. 한때는 자신을 공주처럼 대해 예뻐했었던 오빠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거짓말로 찬드라를 집으로 부르지만, 찬드라를 기다린 건 예복을 입고 명예를 되찾기 위한 준비를 마친 가족들이었습니다. 어릴 적 뛰놀던 추억이 가득한 뒷산에서, 어릴 적부터 그 곳을 지켜온 나무들 아래에서, 오빠들이 파놓은 구덩이가 찬드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누가 신고했을까? 상처가 아물자 찬드라는 그것이 가장 궁금했다. 살려고 발버둥 칠 때 마주했던 친지와 이웃의 태도를 그녀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그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도움은커녕 마을 사람들 간의 암묵적인 동의를 바탕으로 한 살의가 냉랭하게 감돌았다. 그 완고한 시선들 사이에서 유난히 도드라지는 눈길이 하나 있긴 했다. 구덩이 속에 내동댕이 쳐지기 직전, 찬드라는 우연히 어떤 여자아이의 두 눈과 마주쳤다. 꼭 사춘기 시절 자신의 눈을 닮은 여자아이였다.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여자아이의 예사롭지 않은 눈빛에는 불안과 분노가 같이 서려 있었다. 훗날 자기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두려움,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야만적 태도에 분노하듯 결의에 찬 눈빛이었다.
-<어느 날 난민> 중에서
늘 베일로 얼굴을 감싸고 있던 찬드라는 센터에서 난민 인정을 받은 1호 난민이 되었습니다. 진소장은 찬드라의 얼굴에 남은 상처들을 지우기 위해 성형수술을 도와줄 수도 있다고 하지만 찬드라는 거절합니다.
-...왜 그런 낙인을 계속 품고 살려고 하지?
소장의 진지한 물음에 찬드라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 자신도 납득이 잘 되지 않는 이율배반의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한때는 거울을 볼 때마다 죽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도저히 그런 얼굴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절망에 빠져 지내던 어느 날, 찬드라는 가슴 저 밑바닥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는 걸 느꼈다. 삶의 의지. 죽음의 유혹만큼이나 강하게 그것이 샘솟고 있었던 것이다.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참해진 얼굴은 영혼의 주홍 글씨 같은 것, 또한 삶을 견디게 하는 원천이기도 했다.
-<어느 날 난민> 중에서
오랫동안 장바구니에 담아뒀던 책인데 다른 책들을 사느라 이리저리 미루었던 책입니다. 책 소개와 서평들을 보고 언젠가는 읽어봐야지 생각했는데, 몇 주 사이에 먼저 읽어봐야 할 책이 되어버렸습니다. 한 달 전에 읽었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마음을 열고 읽을 수 있었을 텐데, 사실 요즘 제주도 예멘 난민에 대한 뉴스들을 찾아 보고 하느라 첫 페이지를 펼치면서도 마음이 뒤숭숭했습니다. 한국인 미혼모가 맡기고 간 출생 신고가 안 된 아이 민이 난민들과 함께 처음으로 한글을 배우는 모습, 각자 사연을 가진 난민들이 먼 곳에 와서 다시 삶을 시작하려는 간절한 마음이 와닿았지만....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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