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유석 작가님의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었습니다. 프롤로그에 잔뜩 담긴, 개인주의자로 살아가기 너무나 힘든 세상에 대한 소소한 불평들에 확 끌렸던 책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개인주의자' 이야기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판사가 '개인주의자로 살아가기가 왜 이렇게 힘드냐!!!'를 외쳐서 신선하고 강렬했던 프롤로그 때문에 더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결국, 문유석 작가님이 말하고 싶어하는 메시지가 와 닿아 정말 소중한 책이 되었습니다.
분명히 난 내 삶이 우선인 개인주의자고, 남의 일에 시시콜콜 관심이 없으며, 누가 뭐라 하던 내 방식의 행복을 최대한 누리며 살다 가고 싶을 뿐인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알 것 같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살아가면서 분명히 내 일이 아닌데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순간들이 있다. 피가 거꾸로 솟는 순간들이 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책없이 줄줄 흐르는 순간들이 있다. 잘난 과학이 그걸 거울 뉴련의 작용이라고 하든 옥시토신 호르몬의 분비라고 하든 갱년기 증세라고 하든 내 몸과 마음이 격렬하게 반응하는 순간들이 있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데도 지하주차장에서 일하며 힘겹게 공부하는 젊은이가 부잣집 사모님 앞에 잘못 없이 무릎 꿇고 고개 숙이는 꼴을 보면 피가 거꾸로 솟아 앞이 아득해진다. 한남대교를 지날 때마다 십 년 넘도록 마주치는 '실종된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 현수막은 여전히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만든다. 그 현수막을 아이 아빠가 16년째 새것으로 바꿔 걸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알고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뿐 아니라 모두가 경험한 순간이 있다. 눈앞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시퍼런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다시 생각하기도 끔찍한 순간. 몸이 떨리고 무섭고 무력하고 울음조차 안 나오는 시간들을 경험하며 조금씩 깨달았다.
한 가지 특권은 여전히 남아 있다. 아직도 이 사회의 아주 많은 이들에게 법이란 미지의 공포에 가깝다. 법조인들은 약자를 돕기 위해 자기 일을 포기해야 하는 대단한 희상이 필요 없다. 그저 월급 받고 일하고 자기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자기 일에서 5분만 더 고민하고, 말 한마디만 더 따뜻하게 해주어도 큰 고난의 한가운데서 두려워하고 있는 이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황송할 만큼 말이다. 세상에 이런 말도 안 되는 특권이 있단 말인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몸에 불을 붙인 전채일은 생전 내게 법을 하는 친구가 한 명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얘기하곤 했다. 법을 공부한 이들은 바로 그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딱히 인권변호사가 되거나 노동현장에 투신하지 않더라도, 자기 직업에 충실하기만 하다면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가며 생각했다. 한 개인으로 자기 삶을 행복하게 사는 것만도 전쟁같이 힘든 세상이다.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 입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결혼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하며 아이를 키우는 고통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아이가 다시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도록 지키기 위해. 그런 개인들이 서로를 보듬어주고 배려해주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또 그렇기에 얼마나 귀한 일인가.
우리 하나하나는 이 험한 세상에서 자기 아이를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하다. 우리는 서로의 아이를 지켜주어야 한다.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본문에서
'개인주의자로 살고 싶으시겠지만, 마음이 따뜻하고 법조인의 역할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판사님은 절대 완벽한 개인주의자가 될 수 없을 것 같네요. 땅! 땅! 땅!' 이런 생각을 하며 책을 읽는 내내 웃픈 미소가 입에 걸려 있었습니다. 완벽한 개인주의자가 되지 못하면 어때요. 충분히 아름다운 삶을 살고 계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