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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흰 단어들로 심장을 문지르면, 흘러나오는 문장들. 한강 <흰>
    독서일지 2018. 7. 21.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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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단어씩 적어갈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이 책을 꼭 완성하고 싶다고, 이것을 쓰는 과정이 무엇인가를 변화시켜줄 것 같다고 느꼈다. 환부에 바를 흰 연고, 거기에 덮을 흰 거즈 같은 무엇인가가 필요했다고.

     하지만 며칠이 지나 다시 목록을 읽으며 생각했다.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단어들을 들여다보는 일엔?

     활로 철현을 켜면 슬프거나 기이하거나 새된 소리가 나는 것처럼, 이 단어들로 심장을 문지르면 어떤 문장들이건 흘러나올 것이다. 그 문장들 사이에 흰 거즈를 덮고 숨어도 괜찮은 걸까.

    -본문에서


     한강 작가님의 <흰>. 소설과 시집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책입니다. 흰 연고, 흰 거즈, 백지, 각설탕, 배내옷... 작가의 말에서 '하얀'과 '흰' 사이를 배회한 흔적들을 보고는 책을 읽는 내내 눈에 보이는 희고 하얀 단어들을 '흰 OO'로도 읽어보고, '하얀 OO'로도 읽어보았습니다. 죽은 너머니가 스물세 살에 낳았다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었다는 언니와 나 사이의 흰 것들.. 정말 흰 단어들로 심장을 문질러 나온 것 같은 문장들이 투명한 여운을 남기고.. 읽으면서 유독 <노랑무늬영원>이 많이 떠올랐던 책입니다. 처음에 잘 모르고 전자책으로 읽었는데, 종이책에 실린 사진들이 전자책에는 실리지 않았더라구요. 그래서 종이책으로 다시 읽었습니다. 유독 쨍하게 하얀 종이책이 주는 여운이 깊었던 책입니다.


    그녀


     그 아기가 살아남아 그 젖을 먹었다고 생각한다.

     악착같이 숨을 쉬며, 입술을 움직거려 젖을 빨았다고 생각한다.

     젖을 떼고 쌀죽과 밥을 먹으며 성장하는 동안, 그리고 한 여자가 된 뒤에도, 여러 번의 위기를 겪었으나 그때마다 되살아났다고 생각한다.

     죽음이 매번 그녀를 비껴갔다고, 또는 그녀가 매번 죽음을 등지고 앞으로 나아갔다고 생각한다.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그 말이 그녀 몸속에 부적으로 새겨져 있으므로.


     그리하여 그녀가 나 대신 이곳으로 왔다고 생각한다.

     이상하리만큼 친숙한, 자신의 삶과 죽음을 닮은 도시로.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회복될 때마다 그녀는 삶에 대해 서늘한 마음을 품게 되곤 했다. 원한이라고 부르기엔 연약하고, 원망이라고 부르기에는 얼마간 독한 마음이었다. 밤마다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이마에 입 맞춰주던 이가 다시 한번 그녀를 얼어붙은 집 밖으로 내쫓은 것 같은, 그 냉정한 속내를 한 번 더 뼈저리게 깨달은 것 같은 마음.


     그럴 때 거울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그녀 자신의 얼굴이라는 사실이 서먹서먹했다.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같은 죽음이 그 얼굴 뒤에 끈질기게 어른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버린 적 있는 사람은 무람없이 다시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그녀가 삶을 다시 사랑하는 일은 그때마다 길고 복잡한 과정을 필요로 했다.


     왜냐하면,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버릴 테니까.

     내가 가장 약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돌이킬 수 없이 서늘하게 등을 돌릴 테니까.

     그걸 나는 투명하게 알고 있으니까.

     그걸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까.

    -본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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