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해, 여름 손님>, 영화 <Call me by your name>의 문제해설집 같은 책독서일지 2018. 4. 4. 23:52반응형
내가 낚시를 좋아하게 된 여름. 그가 좋아하니까. 조깅을 좋아하게 된 여름. 그가 좋아하니까. 문어와 헤라클레이토스, 트리스탄을 좋아하게 되고 새 울음소리를 듣고 식물의 향기를 맡고 화창한 날 발아래부터 올라오는 옅은 안개를 느낀 여름. 모든 감각이 깨어 있어서 언제라도 자동으로 그에게 달려갔기 때문이었다.
-<그해, 여름 손님> 중에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요즘 정말 핫한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고 감동 받아 원작 소설인 <그해, 여름 손님>을 읽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엘리오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그런 감정을 느껴본지가 너무 오래되어 궁금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결국 원작 소설까지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엘리오의 마음을 모르는 부분은 모르는대로, 공감 가지 않는 부분은 공감하지 못한채로 넘어가도 아쉬운 것이 없을 만큼, 그저 엘리오의 마음을 따라 흘러가도 상관없을 만큼 좋은 영화였지만, 오답풀이 하듯이 문제해설집을 펼쳐볼 필요 없이 좋은 영화였지만, 그래도 놓친 부분이 아쉬워 원작 소설을 펼쳐보게 되었습니다. 사랑에 푹 빠졌을 때의 나를 돌이켜보면 내가 했던 행동들임에도 불구하고 종종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나도 나를 모르겠는데 굳이 사랑과 상처의 감정을 피하지 않고 달려드는 영화 속 인물을 이해해야 할까 싶었지만, 그래도 알고 싶더라구요. 사랑에 대한 감정을 모두 소진해버린 것만 같아 씁쓸했기 때문에 한편으론 엘리오가 부럽기도 했습니다. 왠지 원작 소설에는 더 정확하고 자세히 나올 것 같아 읽어보게 되었는데 잘한 것 같습니다. 소설도 영화만큼 좋았으니까요.
<Call me by your name>을 볼 때 상영중에 중간에 나가는 분도 있었어요. 동성애를 다룬 작품이기는 하지만 제가 우연히 특별한 상황을 겪었나 싶었는데, 영화를 보고 온 후기들을 보니 중간에 상영관을 나간 분들이 꽤 있는 것 같습니다. 불편하다면 굳이 참고 볼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비난을 해서는 안 되지만, 영화관에 억지로 남아있으면서까지 불편함을 느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그런 부분들을 이해하면서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좋은 영화라고 추천하고 싶은 이유는, 동성애가 주된내용이 아니라 그저 누구나 겪었던 한 여름의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통증, 감정의 부추김, 새로운 사람에 대한 흥분감, 손끝 너머에 있을 게 분명한 커다란 행복, 속마음을 잘못 읽을 수도 있고 잃고 싶지 않으며 항상 예측이 필요한 사람들 주위에서 보이는 내 서투른 행동, 내가 원하고 또 간절히 나를 원하기 바라는 사람들에게 쓰는 절박한 간계, 세상과 나 사이에 자리하는 듯한 라이스페이퍼처럼 얇은 미닫이문 같은 몇 겹의 장막, 애초에 암호화되지도 않은 것을 변환하고 또 해독하려는 충동....... 이 모든 것이 올리버가 우리 집에 온 그 여름에 시작되었다.
당신을 위해서하면 뭐든지 연주할게요. 그만 하라고 할 때까지, 점심 시간이 될 때까지, 내 손가락이 벗겨질 때까지. 난 당신을 위해 뭔가 해주는 게 좋고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테니까 말만 해요.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았어요. 친근하게 다가가는 나에게 또다시 얼음처럼 차갑게 반응할 때조차. 우리 사이에 이런 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 여름을 눈보라 속으로 가져가는 쉬운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절대로 잊지 못할 거예요.
-<그해, 여름 손님> 중에서-
영화를 보면서 아리송하고 알지 못했던 부분을 소설을 통해 알게 되었어요. 마치 문제를 풀고 나서 오답풀이를 하듯이요. 백점을 받을 필요도 없고 문제풀이를 해야 할 필요도 없지만 오랜만에 느껴본 아릿한 마음을 되뇌어 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기타 연주를 계속 해달라는 올리버의 말에 뜬금없이 편곡한 피아노 연주를 하며 올리버의 심기를 건드리다 결국 올리버가 포기하려하자 올리버가 원하는 연주를 해주는 엘리오. 그 장면에서 엘리오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소설을 통해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 올리버의 성격에 대해 재밌었던 부분이 있습니다. 영화에서 너무 짧게 보여주었거나, 혹은 각색 작업을 통해서 뺀 부분일 수도 있지만, 올리버가 처음 엘리오의 집에 왔을 때 며칠 동안 아침에 반숙 달걀을 먹지 않았다고 해요. 가정부인 마팔다가 이 지역에 머무는 동안은 반숙 달걀을 꼭 먹어봐야 한다고 말하자, 올리버는 그때서야 동의하면서 사실은 반숙 달걀을 어떻게 깨뜨려야 하는지 모른다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엘리오의 아버지는 단번에 올리버의 'later'가 수줍음이 많은 그의 성격에서 나오는 행동이라는 걸 알았지만, 엘리오는 올리버의 'later' 때문에 오해를 하기도 하는 부분이 재밌었습니다. 영화에서도 나타나지만 소설의 호흡을 따라 읽어보니 올리버의 행동과 말투가 더 재밌었던 것 같습니다.
영화의 엔딩씬 이후의 두 사람의 삶이 어떻게 얽히는지 궁금한 분들은 원작 소설 <그해, 여름 손님>도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고개를 들었을 때 집과 정원 어딘가에 있는 올리버의 보습을 보면서 엘리오는 '머지않아 고개를 들었을 때 당신이 더 이상 그 자리에 없는 날이 올 테니까.' 생각하며 아쉬워합니다. 그해 여름이 지나면 당연한듯이 눈 안에 담겼던 올리버를 더 이상 볼 수 없을거라는 생각에 한없이 슬퍼했던 엘리오. 올리버를 만나기 이전과 이후로 딱 나뉘어버린 삶을 평생 살아가야 할 생각에 낙담했던 엘리오는 '삶이 준 가장 큰 선물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 구분선을 움직여 준 것이었다. 많은 이가 X 이전과 X 이후로 삶을 나누도록 도와주었고 많은 이가 기쁨과 슬픔을 가져왔으며 또 많은 이가 내 삶을 진로에서 벗어나게 했으며 반면 아무런 변화도 만들어 내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첫사랑의 감정에 온 몸을 던지고, 또 금새 아문 상처를 잊은 채 'X'의 빈칸을 누군가로 채워가며 사랑을 하다가, 결국은 마음에 새겨진 흉터를 보면 그때만큼은 아프지 않으면서도 괜스레 첫사랑을 떠올리게 되는... 그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흔한 사랑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반응형'독서일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설 <무지개를 기다리는 그녀> 6년 전 죽은 그녀를 AI로 부활시킬 수 있을까 (0) 2018.04.19 <페미니즘을 팝니다> 페미니즘의 다른 얼굴을 담은 책 (0) 2018.04.14 소설 <내가 죽기 일주일 전>, 저승사자가 된 첫사랑이 찾아왔다. (0) 2018.03.31 소설 <한복 입은 남자> 이상훈 작가님의 열정! (0) 2018.03.21 나폴리 4부작을 읽고, 한 인생 살아본 것 같은 먹먹함 (0) 2018.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