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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스푼의 시간> 로봇 은결이 스며들었던 세상
    독서일지 2018. 6. 10.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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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봐라, 네 안에는 물리학과 생물학뿐만 아니라 화학 천문학까지 들어 있지. 너는 지금까지 사람이 밝혀낸 한도 내에서 우주의 역사를 모두 알고 있을 거다. 우주의 나이가 137억 년을 조금 넘나 그렇다지. 그 우주 안의 콩알만 한 지구도 태어난 지 45억 년이나 되고. 그에 비하면 사람의 인생은 고작 푸른 세제 한 스푼이 물에 녹는 시간에 불과하단다. 그러니 자신이 이 세상에 어떻게 스며들 것인지를 신중하게 결정하고 나면 이미 녹아 없어져 있지.

    -<한 스푼의 시간> 중에서


     구병모 작가님의 <한 스푼의 시간> 참 재밌게 읽었었는데 다시 읽고 싶어져서 꺼내보았습니다. 이번주에 시작한 미니시리즈 <너도 인간이니>에서 순수한 로봇 남신3(서강준)를 보다보니 은결이 떠오르더라구요! 엄마 오로라(김성령)가 먹던 토스트를 칼로리 오버라고 빼앗던 모습이 참 로봇답다 느껴지면서도 빨리 시장 구경 가고 싶어서 하는 행동인 걸 생각하며 인간적인 귀여움도 있었습니다. 앞으로 남신3의 인간사칭 프로젝트가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하기도 하고 인공지능 로봇의 모습이 서로 다른 두 작품에서 어떻게 비춰지는지 비교하는 재미도 느낄 겸 다시 꺼내본 <한 스푼의 시간>! 인공지능 로봇이 발달하는 속도가 이미 빨라졌다는 건 전혀 로봇 산업과 관계 없는 삶을 사는 저도 느낄 수 있는데요, 그에 비해 드라마나 소설로 다양한 캐릭터들을 만나지 못해 아쉬움이 큽니다. 그래서 <너도 인간이니>가 참 반갑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그럼 <한 스푼의 시간>을 소개할게요!


     아내와 사별한 후 혼자 세탁소를 운영하는 명정. 명정의 하나뿐인 아들마저 외국생활 중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명정은 아들에게서 보내진 커다란 택배를 받게 됩니다. 그 상자 속에는 17세 정도의 소년 모습을 한 로봇이 들어있습니다. 명정은 둘째 아이의 이름으로 남겨두었던 '은결'이라는 이름을 로봇에게 붙여주고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은결은 무료함이라는 감정을 모르며 주인을 위해 어떤 과업을 반드시 수행해야 한다는 신념이나 욕망도 없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최소한의 소명을 다한다. 시청각을 비롯한 각종 외부의 자극이 주어지면 그에 대한 반응을 도출하기 위해 나노초 단위의 검색 및 저장과 정보 재배열이 이루어진다. 내장 카메라와 신체 각 부분에 분포한 오감 센서로 주인의 상태를 파악하고 그에 알맞게 반응하는 기능이 있으나, 그것은 인간의 심리와 행동 양상이 천문학적 수의 패턴으로 입력되어 있어서다.


     눈 역할을 하는 내장 카메라, 오감센서, 로봇의 회로, 인공두뇌. 어렵게 느껴지는 단어들이지만 앞에 '은결의'라고만 붙이면 어찌나 정이 가고 찰떡같이 어울리는지, 로봇이라서 생길 수 있는 엉뚱한 일들과 로봇임에도 불구하고 더 인간적으로 와닿는 일상들이 소소한 재미를 줍니다. 작가 후기를 읽다보면 많은 분들도 도움을 주셨지만 구병모 작가님이 얼마나 많은 노력으로 탄생시킨 캐릭터인지 느껴져서 더 애정이 가더라구요!


     "좋지 않으시면 따라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지우지는 않겠습니다."

     "어쭈, 이것봐라. 주제에 저가 하고 싶은 것도 다 있네."

     "하고 싶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를 역시 이론으로 알고 있습니다.제가 지우지 않기를 선택한 이유는, 그게 무엇인지 알아두어야 다른 손님께 함부로 사용하지 않으리라고 판단해서입니다."


     본인도 모르게 로봇의 연산으로 인해 능청스러움을 발산하는 은결의 모습이 귀엽습니다. 명정의 행동 하나하나가 감정을 배워가는 로봇 은결에게 입력되고 동네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명정에게서는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또 하나하나 입력해나가는 모습이 색다르고 재밌고 또 감동적입니다. 로봇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했던 열린 마음과 호기심을 품고 있는 은결의 모습이 어떤 아픔을 가져올지 알고 읽으니 더 짠했습니다. 하지만 세제 한 스푼이 물에 녹으면서 세상에 어떻게 스며들 것인지를 순간순간 치열하게 결정하는 것처럼, 결말을 알아도 은결은 똑같이 마음을 열고 사람에게 호기심을 가질 너무나 인간적인 로봇이기 때문에 은결과 명정, 시호의 이야기를 언젠라도 또다시 읽어볼 것입니다. 


     느낌은 역시 느낄 수 있는 존재에게 들려주었을 때 성립되는 추상적인 개념이며, 은결에게 있어서는 감각기관을 통한 외부 정보의 입수까지가 한계일 거라고 했다. 습득한 정보를 마음속에서 어떻게 굴리는지가 사람이 말하는 느낌의 시작이라고.

     그리하여 은결은 사람들의 태도와 반응 관찰을 통해,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더위'라는 것을 인지한다. 이마에서 땀을 훔친다. 별로 도움되지 않더라도 연방 손부채질을 한다.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바닥에 들러붙은 젖은 수건처럼 빈둥거리고 뒹군다. 연하 작용이 힘들고 물이나 액상과당음료를 찾는다. 마트나 은행의 에어컨 앞에 입 벌리고 설 때 비로소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은결은 미니선풍기도 부채도 없이 한낮의 지열을 견디며 걸어가는 시호의 뒷모습을 본다. 표정을 알 수 없는데도 어깨의 움직임이나 발걸음이 힘들어 보인다. 그러면서도 가끔 뒤돌아보며 그가 뒤처지지나 않았는지 확인하며 미소 짓는데, 은결은 문득 그녀가 견디고 있는 그 열기와 고통이 어떤 것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그녀를 미소 짓게 하는지......

     알고 싶다

     싶다......

     알아야 한다고 판단한다

     알아볼 필요성을 인식한다

     알게 될 것을 전망한다

     이중에서 의미의 거리가 알고 싶다와 1센치미터만큼이라도 더 가까운 것은 어느 쪽인지, 은결은 알지 못한다.

    ...... 각종 통계와 자료를 분석하여 모르는 상태에서 벗어날 것을 지향한다......


     시호와 함께 버스를 타면서 수하물이 아닌 사람으로써 버스 운임을 내는 사소한 것에도 인공심장의 움직임이 빨라지던 은결의 모습, 마주한 두 개의 거울 속에서 끝없이 복사되는 자신의 이미지에서 혼란을 느끼지만 그 옆에 함께 서 있는 시호의 모습으로 인해 자기 자신을 인식하던 은결의 모습, 무언가에 사로잡힌 사람이 자연스럽게 행동을 멈추고 손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시호의 모습에 스르르 행동을 멈추던 은결의 모습, '그러고 싶은'게 어떤 감각인지 모르면서 어느새 조금씩 '그러고' 있는 은결의 모습, '무너진다는 건 어떤 것입니까' 묻곤 하던 은결이 모로 무너지던 모습들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작은 동네의 작은 세탁소. 하지만 은결이 스며들기에는 결코 작지 않았던 세상. 따뜻하고 포근한 빨래 향이 나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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